불편한 대통령



  

  불편하고 또 불편하다. 개인적인 예상을 뒤엎고 콘크리트 지지율을 자랑해 온 MB가 마침내 당선됨으로써, 더 없이 불편하다. 이번 대선 관련해서 매우 답답했고 아쉬워서 몇 개의 글이라도 써볼까 했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시간적 여유야 어떻게든 내보려고 할 수 있겠으나, 힘이빠져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변했기에. 감정의 과잉 상태로 글을 쓴다는 것은, 보는 사람에게도 내게도 해가 될 뿐더러, 그런 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은 스스로의 정신 건강에도 좋지 못하다. 격변하는 상황은 곧 내 상황, 그리고 앞으로의 지향 점에 대한 수정을 요하게 되고, 그리고 그것이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변화를 주는 것 보다는 내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 훨씬 쉽기에. 그리고 대학교 다니면서 전자가 얼마나 힘든가를 체험했으니.


  내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나는 대학 고학년들에게 대선이 어떤 관련을 지닐까,를 개인적으로 추측해보고자 한다. 먼저 지난 10월 즈음에 있었던 친구와의 대화를 인용해보도록 하자.

  "현대 금융 자본의 양대 축이 부동산과 주식인데, MB는 두 부분에 걸쳐 모두 사기를 쳤어.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으러 하고 있어. 그런데 이제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야. 그런 것 알리고 싶고 다른 활동도 많이 하고 싶은데 내 삶이 너무 바쁘고 정신없다. 그러니 일단 영어 공부."

  난 고학년에 접어든 친구, 아니 졸업 시기가 다가온 친구가 한 말이 거의 현재 대학 고학년들의 상황을 적절히 표현했다고 본다. 나 역시 지난 대학생활에서 수반한 리스크를 만회하려고 이렇게 뛰려고 하는 걸 보면. 움직이지 않다 시피해, 거의 보이지가 않는학생들을 보면서 이상한 느낌이 든다. 난 대선 관련해서 학생들의 생각이 궁금하고, 그 의견으로부터 내 생각을 정리하고, 의견을 조정하려고 하는데 이곳에는 거의 대선 관련 글이 올라오지 않았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 때와 비교하자면 이는 꽤 기이한 일이다. 대학생들이 그런 이야기를 할 다른 통로를 찾은 걸까. 아니면 정말 무관심해진 걸까. 아니면 이미 자신의 미래를 꾸려나기위해 자기계발을 할 시간의 효용이 글 한 편 쓰는 효용보다 크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까. 어느 편이 진실인 줄은 모르겠으나, 내 예상에 의하면 친구와의 대화에서도 나왔듯이 마지막에 언급한 쪽의 확률이 높은 것 같다. 신입생 때의 설익은 열정도 저리가고, 더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나와 사회의 관계, 그 속에서 자신의 역할 또 주어지는 기대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셈했으리라.
"정치와 종교이야기는 비즈니스를 하는 사이에는 절대 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듯이, 그리고 그 격언의 교훈을 대학생활에서 경험했듯이, 이를테면 피아의 구분이 생기는 최초의 단계가 된다는 것 또한 느꼈을테다. 그래, 이건 다른 대학생이 아닌 나에게 주어지는 비판이야. 나에게.

  대선 최종 과정에서 이해되지 못할 행동이 하나 있다. 내 마음을 동하게 한. 대통합 민주신당은 어째서 BBK특검에만 매달렸는가,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많은 대학생과 언론과 한나라당이 싸잡아서 네거티브로 승부하지 말라고 비판한 대목이다. 정동영 20%와 이명박 45% 지지율의 차이는 현실적으로 선거 기간 한 달이 남은 상태에서 아주 특별한 사건이 아닌 이상 뒤집어 엎기 힘든 수치이다.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의 자서전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다. 그가 경기도 지사 선거에서 김문수 의원과 붙었을 때의 생각, "20% 이상 지지율이 차이나는 걸 보고 선본 구성원들도 다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래도 정정당당히 싸우고자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신당 측에서도 받아들여야 했을까. 그것은 아닌 듯. 대학생들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결과를 정치 엘리트들이 포진한 신당 측에서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들은 정말 BBK 특검 결과의 여론 조성에 따른 MB 사퇴를 고려한 듯 하다. 그들의 호언 "MB는 한 방이면 간다, 우리는 승리에 목말라 있다"고 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렇다면 신당 후보 정동영의 올인 전략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의 전화 메시지는 대선 후보라기보다는 차라리 MBC 현장 기자의 목소리로 들려온다. 

  "유세 중에 만난 할머니가 반드시 거짓말하는 후보를 이겨달라고 했습니다."

  기자의 정명론과 균형감각, 원칙과 명분과 같은 능력은 대통령에게 그리 적합한 품성은 아닌듯하다. 특히나 이번 대선과 같이 경제라는 화두가 시대정신이 된 선거에선 말이다. 그런데도 왜 그는 최종 유세에서도 그렇게 진실에 집착했을까. 정말 10년 경력으로 체화된 기자 정신을 속일 수 없었던 것이었을까. 그것을 알아달라고 국민에게 요청하고 싶었던 걸까. 그는 이제 PD수첩 연출 PD도 아닌데.


  진실은 그 자체로 진실일 뿐, 중요한 조건은 될 수 없다. 나에게는 정당성과 정의가 중요하더라도 그것이 모든 사람의 중요한 기준이 될 수는 없어. 거창한 정당성은 버려, 대다수 민중에게는 맞지 않는 기준이니까. 너 역시 민중 중에 하나인 걸. 아직 모든 부분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주위 사람의 위장 전입, 위장 탈세를 비판했고, 학생 회비 부정 지출을 막으려 했고, 대학 사회를 투명하게 만들고 싶었던 이로서, 그리고 그 최종적인 결과물은 정치를 통해 구현될 것이라 믿었던 사람으로서 MB의 이번 지지율은 더없이 끔찍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 기준과 내 기준을 '확인'했고, 이제는 다시 내가 균형점을 옮길 차례가 온 것 같다. 어쩌면 선배들이 먼저 겪은 과정이기도 하다.


    






 

by 오픈-toU | 2007/12/23 03:07 | 2. opinion - ours | 트랙백 | 덧글(8)
종교에 ‘선택’이 가능해야 한다(과학과 종교)
열혈공대햏자  (IMIN 7996) :: (뚜루루, 아방가르드에 답하여)종교에 ‘선택’이 가능해야 한다(과학과 종교) :: 2007/07/09 00:31  


종교에 ‘선택’이 가능해야 한다(과학과 종교)


현대는 종교의 시대인가

  영화 『밀양』이 화제란다. 이창동 감독은 “종교가 아니라 한 인간의 고민에 대해 그려내고 싶었다”고 하며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는 듯 하지만, 밀양의 여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 - 신을 사랑하다, 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바로 종교에 대한 영화이다. 종교가 한국 사회의 소시민들에 끼치는 영향, 그리고 거기에서 배제된 개인의 선택은 어떠할 수 있는가에 대해 다룬 영화라고 보는 편이 나은 듯 하다. 아들까지 잃은 신애에게 “하느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강권하는 소시민들. 광기에 가까운 이들의 믿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명박은 몇 년 전에 “서울특별시를 하느님에게 봉헌하겠다”는 발언을 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정치인이 종교적인 색을 드러내는 것은 반대파를 만들기 십상인데, 그렇게 까지 말한 것을 보면 과연 이명박의 지지도에 대한 자신감 때문 만이었을까.
  새뮤얼 헌팅턴의 화제작 『문명의 충돌』에서는 세계를 7개의 구역으로 나눈 뒤, 그들의 문명사적인 조류를 살펴, 미래를 예측하려 했다. 그러나 후에 밝혀진 것으로 그 구역을 구분하는 기준이란 바로 ‘문명이 아니라 종교’였다. 믿는 종교에 따라 세계를 이슬람권이냐, 개신교권이냐, 유교권이냐 등 매우 단순한 구도로 나눈 것이지만, 세계의 독자들은 그 구도에 빠져들어 『문명의 충돌』열풍이 불었다. 그것이 종교가 아니었다면 과연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런 사실 이외에 주위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사례를 들어보자. 크리스천인 대학생 친구가 있다. 그와는 주말에 거의 만날 수 없는데, 다름 아니라 열성 크리스천이기에 주말 모두 교회를 나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임을 가지려해도 주말에 할 수는 없는 형편이고, MT 일정을 잡는 데도 고충이 있었다. 다만 씁쓸한 것은 앞으로도 친구를 주말에 볼 수 있을 확률은 희박하다는 것이다.
  이제 조금 유별난 경우를 살펴보자. 2001년 9.11사태를 둘러싸고 한 가지 도발적인 평을 낸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이기적 유전자』를 펴낸 리처드 도킨스였다. 그는 “종교는 바이러스와도 같다. 이번 9.11사태도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종교를 믿는 이들 때문”이라고 하면서 종교에 대한 강력한 불신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그러한 발언은 충격적이었다. 왜 그는 적이 생길 소지가 많은 발언을 해야만 했는가.


과학과 종교의 관계

  지구촌 곳곳에 인터넷 망이 깔리고, 선진 기술이 세계를 지배하는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재, 종교만큼은 과학의 힘으로도 제어가 불가능하고 도리어 그 세가 확장되고 있는 추세이다. 종교는 영화 『밀양』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인간의 죽음 앞에서도 의연해 질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하고, 복잡다단한 세계를 나누는 분석 틀로도 간단히 활용되고, 정치의 영역에서나, 일반 생활의 영역에서나 막강한 위세를 자랑한다. 그 와중에 나온 종교 혐오에 가까운 리처드 도킨스의 발언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종교의 유력한 경쟁자는 과학이었으며 처음에는 기술자로 불리던 과학자들이 나중에는 ‘신의 영역’으로 아무도 공격하지 못했던 그들의 권위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종교와 과학과의 관계는 때로는 물과 불과 같이 공존할 수 없는 사이로 묘사되기도 했고, 양립이 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인 적도 있었다. 과학과 종교와의 관계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양립 불가능 하다는 제거론, 둘 간의 영원한 평화를 주장하는 분리론, 시공간에 따라 둘 사이는 변한다는 친구론이 바로 그것이다. 제거론은 우주에 대한 수학적 탐구를 신적인 과업으로 여기는 물리학자들이 건재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그리고 분리론은 둘 간의 의사소통을 원천봉쇄했다는 점에서 걸맞지 않다. 그리고 “과학과 종교가 ‘동일한 실재’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 방식’이다”라는 기본 전제를 지닌 친구론은 호응을 얻고 있긴 하나 역시 모순점이 존재한다. 친구론의 대표적인 이론이면서 종교인들이 많이 주장하는 ‘유신 진화론’은 과학으로 증명되지 못한 것에 은근슬쩍 ‘지적설계자’를 끼워 넣으며, 여기서 종교가 존재한다는 궁색함을 보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종교와의 관계는 아직도 논란이 일고 있고, 뚜렷한 결론은 나지 않고 있다. 어쩌면 영원히 결론이 날 수 없는 문제일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이상욱(한양대 철학)교수는 그 둘 간의 관계를 언급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관해 토로한 적이 있다. 그는 수업시간에 진화론과 창조론 이야기를 꺼낸 후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절대 금지한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는 상황을 견뎌야 되는 학생도 괴롭겠지만 그런 학생이 난처해하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교수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답답한 심정을 표현한 바가 있다. 장대익(KAIST 인문사회학)교수는 과학과 종교와의 관계를 논하는 논문 말미에서 결론을 회피하고 “그간 한국사회에서는 과학과 기독교와의 관계만을 다루곤 했으니 나머지 종교와의 관계도 논하면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며 넓은 차원에서의 토론을 유도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하나의 사실에 관해 간단한 대안 없이 다른 사실에 대해 토론한다면 ‘어느 정도’의 결론도 얻지 못할 소지가 있다.

종교에 선택의 자유를 주어야

  이렇게 교수들도 결론을 낼 수 없고, 검토 차원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면 대학생으로서 논의할 수 있는 폭은 어디까지일까. 우리는 과학과 종교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하기 전에 과학자가 될 것인지, 종교인이 될 것인지 결정하는 시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학자로서, 그리고 종교인으로서 그 둘의 관계에 대해 말하면 자신의 존재에 기반한 사고로부터 불편함이 발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은 친지에게 전파성이 없는 반면에 종교는 그들에게 그것이 있다. 과학자는 성장 과정에서 그 분야에 관심을 지닌 사람들이 학문을 탐구하면서 만들어진다면, 종교인은 자신의 친지 등으로부터 강요에 가까운 권유를 받으며 만들어진 것이 다반사이다. 즉, 종교에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종교에도 선택의 자유, 그러니까 독자적 진리 탐구 정신이 요구된다면 어떨까. 오히려 과학자나 종교인이기를 강요당하지 않은, 그리고 어릴 적부터 그 두 분야에 대해 모두 관심을 가지고 균형적으로 연구해 본 사람들이야말로 과학과 종교에 대한 보다 건설적인 토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by 오픈-toU | 2007/07/09 01:01 | 2. opinion - ours | 트랙백 | 덧글(0)
결혼 하기 전에 점검할 것

결혼하고 싶다면, 싱글녀끼리, 남자 품평회를 할 것이 아니라, 결혼해서 잘 먹고 잘사는 유부녀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라. 결혼하기 전에 남자에게 꼭 물어봐야 할 것.

삽십대 중반. 내가 ‘노처녀’란 말을 듣게 될 줄은 이십대 중반만 해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싱글’ 이면 싱글이지, 노처녀가 뭐야?’ 입을 삐죽거리거나, 정말 흥분하는 것을 보니, 내가 노처녀가 맞긴 맞나보다. ‘올해엔 꼭 결혼하라’는 달갑지 않은 덕담을 마주하고서, 또다시 한숨을 내쉰다.

진심으로 내가 어디가 모자란 게 아닐까, 결혼 하나 못했다고 사회의 낙오자처럼 느껴지기까지 한 것. 그런 주제에 “결혼 정보 회사에 신청해봐”라는 선배 언니의 권유를 거절했다.

“결혼 정보 회사에 돈 주고 등록한 남자들 뻔하지 않겠어. 자기가 너무 잘나서 과시하고 싶거나, 아니면 주변머리가 너무 없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런 남자 싫어.”(사실은 돈이 아까워서다) 선배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이거였다. “그래. 넌 아직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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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유부녀 친구들 왈.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결혼 상대로 아주 좋지 않다는 것. 주변에서 나에게 이런저런 충고를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굶어 죽어도 난 취향과 입장이 없는 남자는 사랑할 수 없다고.”(그러면 또 그녀들은 말한다. 취향? 웃기시네.)

유부녀 친구들은 나의 남자 취향을 보면 마치 밥 먹을 때 발을 떠는 습관을 고쳐주거나, 혼자 삐죽 튀어나온 흰머리를 뽑아주고 싶은 것처럼, 바로잡아 주고자 하는 욕망을 느낀다.

결혼 잘해서 잘 먹고 잘사는 나의 유부녀 친구들이 말하는 결혼하기 전, 남자에게 반드시 체크해야 할 것들.

어머니보다는 아버지

남자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건 여자가 ‘어머니’의 영향을 받는 것과 조금 다른 차원이다. 여자는 결혼과 사랑에 대한 판타지가 강하기 때문에 영화나 책 등에서 영향을 받을 수도 있지만, 남자는 직접 보고 느낀 것에서 영향을 더 많이 받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를 은연중에 따라 하게 되는 것. 집안 분위기를 물어보는 것은 조심스러운 문제. “우리 부모님은 이런 사소한 문제로 귀엽게 싸운다. 당신 집은 어때?” 하고 자연스럽게 떠본다.

남자는 아버지에게서 여자를 대하는 태도를 포함한 대인 관계를 배운다. 남자친구 집에서 경제권을 누가 쥐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어머니가 경제권을 쥐고 있다면, 나에게 곳간 열쇠가 들어올 가능성이 크다. 남자친구의 아버지가 성품이나 시어머니 될 사람을 끔찍하게 아낀다면, 일단 합격점.

그의 집에 자주 놀러 가라

결혼할 마음을 먹었다면 그의 집에 자주 놀러 가라. 세 번만 가면 그의 집안 분위기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집안 분위기와 공기 같은 것이 편안하게 감지되어야 한다.

연애할 땐, 불효자나 집에서 내놓은 자식이 간섭받지 않고 좋을 것 같이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애정 결핍’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살면서 결국 어떤 방향으로든 영향을 미친다. 그걸 다 받아줄 것이 아니라면,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게 자랐어도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 좋다. 한 가정의 가장이자, 내 아이의 아버지가 될 사람이라면, 더더욱.

싸울 때 불끈하는 다혈질은 NO!!

성격 파탄자가 아닌 이상, 호시절엔 꽃노래 부르면서 사랑을 나눌 수 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을 하다보면 언제 어떤 위기가 닥칠지 모른다. 잘해줄 때보다, 위기 상황이 닥쳤거나 상황이 좋지 않을 때 그가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본다.

싸울 때나 싸운 후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도 반드시 살펴봐야 한다. 절대 먼저 사과하지 않는 스타일은 결혼 후에도 계속 그럴 것이다. 싸운 후 잠수를 타는 사람도 경계하라. 습관적으로 잠수 타거나 연락 불통이 되는 경우는 이기적이거나 바람둥이일 수 있다.

또 싸울 때, 자기 성질을 못 이겨 부르르 떨면서 주먹을 꽉 쥐거나 나에게 욕을 한다면 폭력을 휘두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사소한 습관이 평생을 좌우한다

결혼하고 살면서 싸우는 일은 주로 사소한 일 때문이다. TV를 볼 때 말을 많이 하면서 보는지, 밥을 먹을 때 신문을 보면서 먹는지, 국이 없으면 밥을 안 먹는지 등 사소한 문제가 결국 커져서 사이가 악화되는 것.

TV를 따로 보거나, 섹스는 하되, 잠은 따로 자면 사랑의 ‘본질’이 변하지 않았더라도 멀어진다. 같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부딪쳐봐야 알겠지만, 상대의 집에서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서 데이트하거나, 적어도 3박 이상의 여행을 가보라.

세계 여행? 또는 아파트?

요즘은 각자 돈 관리를 하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어쨌거나 부부가 되면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부를 축적해나가는 경제 공동체가 된다. 그의 직업을 알면 그의 경제적 수준을 대충 알 수 있기 때문에 결혼 후 내 삶의 수준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결혼했을 때 중요한 것은 돈을 얼마나 버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다. 소비에 대한 가치관이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이 좋다.

악착같이 벌어서 ‘아파트’나 ‘부동산’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계 여행’을 하는 사람이 있고, 연봉이 1억원이라도, 10만원짜리 밥을 먹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며, 버는 대로 다 쓰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데이트할 때는 팍팍 쓰는 게 좋을 수도 있겠지만, 결혼 후에도 친구와 후배에게 매일 ‘쏜다’고 말하는 남편이 미워질 수도 있다.

그의 비전을 보라

그가 어떤 무리의 친구와 어울리는지 그의 친구를 보면 그의 성품이 어떠한지 대충 알 수 있다. 어릴 적 친구, 대학 동창 등을 만나는 것은 기본. 아울러 그를 결혼 상대로 생각한다면 그의 회사 동료나 선후배를 만나볼 것.

그의 대인 관계와 사회성뿐 아니라 그가 얼마나 그 분야에서 인정받는 사람인지, 그의 비전과 미래까지 점쳐볼 수 있다.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사람 중에서 알고보면 회사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간판만 번지르르한 경우도 있으니까.

노처녀 vs 유부녀, 좋아하는 남자 이렇게 다르다

꽃미남 vs 돌쇠

연애 시절에야 금성무나 원빈 닮은 남자친구 옆에 끼고 다니면, 봄날에 새 신발 신은 것처럼 뿌듯하겠지만 결혼하면 말이 달라진다. 아무리 일편단심 청렴결백(?)하여도 남자에게도 ‘얼굴값을 한다’는 말은 적용되기 때문. 얼굴 보고 여자들이 달려들 게 뻔하다.

꽃미남이 연애 시절에는 남자친구로 과시하기 좋지만, 남편으로는 바람피울 염려 절대 없는 돌쇠나 슈렉이 더 안심.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니지 않나.

문화적 취향이 세련된 남자 vs 경제적 관념이 있는 남자

난해한 예술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고, 와인 리스트를 줄줄 외우는 문화남. 우아하고 예술적 성향이 다분한 남자와 평생을 함께하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하지만, 지적인 허영심으로만 가득한 남자와의 일상은 생각처럼 우아하지 않다.

<웃찾사>을 보려고 하면, EBS에서 방영하는 국립극단 발레 공연 실황으로 채널을 돌리고, 생일 선물로 관심도 없는 몇 십만원짜리 나나무스크리 티켓을 선물하는 남자. 입으로만 우아한 문화남 타입보다는 나에게 맞는 조언을 해주는 컨설턴트. 액션·코미디 영화를 좋아하더라도, 재테크에 관심 있으며 경제적으로 능력 있는 현실적인 남자가 결혼 상대로 알맞다.

일과 사랑에 빠진 남자 vs 집과 사랑에 빠진 남자

데이트 중간에 응급 수술, 긴급 출동, 해외 바이어와 통화하는 남자친구. 자기 일에 누구보다 열정이 강한 능력 있는 남자는 매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일도 정도껏 해야 한다.

밖에서 일과 사랑에 빠진 것도 모자라 집에 일을 싸가지고 오거나, 너무 에너지를 소모해 집에서는 주말에 잠만 자느라 바쁠 테니. 연애는 워커홀릭과 해도 결혼 상대로는 공과 사, 회사일과 집안일을 완벽하게 분리하는 남자가 좋다.

남자다운 남자 vs 설거지도 하는 남자

근육질에 터프함, 의협심이 둘째가라면 서러울 의리파.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넘치는 남자다운 남자가 멋있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남자다운 남자 속엔 대부분 권위적이고 마초적인 성향이 숨어 있다.

애인일 땐 남자다운 남자에게 보호받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겠지만, 이런 남자들이 결혼하면 대개 ‘물 가져와’라 ‘자리 펴라’고 명령한다. 연애할 땐 팔불출이 꼴불견이어도, 결혼 상대로는 나를 공주님처럼 떠받드는 다정한 남자가 좋다.

여자 핸드백을 들어주는 남자를 보고 꼴불견이라 욕했어도 결혼하면 설거지도 하고, 청소기도 돌리는 착한 남편이 될 가능성이 크다.

옷 잘 입는 남자 vs 입혀주는 대로 입는 남자

제냐 슈트에 행커치프를 꽂고, 여자친구와 패션지를 보면서 브랜드 알아맞히기 게임을 하는 남자. T.P.O에 맞는 옷차림의 센스 만점 남자는 연애 상대로는 제격이지만, 결혼 상대로는 피곤하다.

아내의 옷을 골라주는 것까지는 좋지만 스타킹 색이 이상하다고 하루 종일 구박하고, 쇼핑하는 데 따라다니며 일일이 참견하는 것만큼 성가신 일은 없기 때문. 월급의 반 이상을 옷값으로 지출할 뿐 아니라, 선물을 하면 자기 맘대로 바꾸기까지 하는 패션광 남자는 남자친구로만 족하다.

결혼 상대로는 여자가 입혀주는 옷을 군말 없이 입는 남자가 좋다.

by 오픈-toU | 2007/06/28 05:11 | 7. data | 트랙백 | 덧글(0)
학벌사회문제, 개인적 실천부터
열혈공대햏자  (IMIN 7996) :: (뚜루루에 답하여) 학벌사회문제, 개인적 실천부터 :: 2007/06/14 23:30  



학벌사회문제, 개인적 실천부터

  이제 조금 식상하기도 하다. 대한민국이 학벌 사회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기에 그에 따른 대책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민주노동당 같은 정당에서도 내세운 지 이미 오래되었다. 앞으로도 몇 십 년간은 계속 될 거 같은 이 문제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구나, 하고 사회 탓을 하며 지나쳐 버릴 수도 있지만, 김동춘(성공회대 사회학 교수)이 “결국 학벌 사회 문제에서 대학생이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역설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출신 대학별로 듀오에서 매기는 결혼 지수 점수나 기업 인사팀만 알고 있는 출신 학교별 가중치 점수, 사회에서 밀어주고 당겨주는 학연 등을 학벌 사회의 병폐로 여길 수 있는데, 오히려 내가 실감하는 부분은 그것보다는 주변에서 흔히 벌어지면서도 잘 인식하기를 껴려 하는 부분이었다. 서울 시내의 강연회에 참석할 때, 그 가운데 대학생이 질문을 던질 때, 이상하게도 질문을 하기 전에 현재 재학 중인 대학을 밝히는 경우는 두 개 학교, 고려대와 연세대(가나다순) 학생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는 내 경험에서 오는 진단이지 결코 확실한 통계가 아님을 밝혀둔다. 그것이 두 학교의 전통, “민족 고대”나 “통일 연세”를 먼저 말하면서 자신의 소속과 특징을 자신 있게 밝히고 했던, 이른바 FM을 하던 습관에서 오는 건지, 아니면 명문대학생이라고 하면 자신의 질문을 유심히 들어 줄 것이라는 기대에서 나오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 별 뜻 없이 말 한 건지 알 도리는 없다. 그냥 지나쳐 버리기에는 내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알게 된, 여러 여자 명문 대학생에게 장난스레 물어보게 되었다. 여태까지 교제한 남자는 왜 거의 명문대 생이었냐고. 그들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다. “활동하게 된 단위에서 만난 사람이다” 혹은 “소개 받은 남자가 명문대 생 뿐 이었다” 그렇다면 그 활동한 단위에 있었던 남자는 모두 명문대 생이었을까. 그리고 왜 주변 사람들은 명문대 생 남자만 소개시켜 주었던 걸까.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개 쯤 지니고 있는 블로그나 싸이월드 미니홈피(이하 통칭해서 홈피로 부르기로 하자)의 프로필을 살펴보자. (오해의 소지가 있기에 첨언하자면 이 역시 내가 관심이 있던 주제였기에 유심히 관찰하기는 했으나, 현실적인 제약으로 전국 대학생 모두의 홈피 프로필을 알 수는 없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내 경험에서만 오는 판단일 뿐이다.) 이번에는 앞서 말한 것과는 조금 다른 현상이 벌어진다. 명문대 생들은 홈피에 짤막한 시나 격언, 경구 그리고 그림 등을 배치하는 반면, 오히려 그렇지 못하다고 평가되는 대학생들이 자신의 학내 외 활동 경력, 공모전 수상 내역 등을 배치시켜 놓았다. 물론 요즘 기업에서는 이력서에 홈피 주소를 써 넣게 하여 지원자의 성향이나 경력을 알고 싶어 하기에 그렇게 프로필에 자신 있는 것만 골라 넣었을 경우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명문 대학생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한 선배가 내게  “소위 비명문대 생들은 활동 경력이나 공모전 수상 내역으로 처지는 학벌을 만회하려는 경향이 있고, 학벌을 의식하기에 홈피에서 만큼은 처지는 느낌이 나지 않게 하려 한다” 고 했는데 이것이 정말 그 선배만의 생각일까.

  누구나 학벌 중심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는 깨져야 한다고 하고 있으나, 앞선 예를 보면 어느 정도 사고가 유연한 대학생에게조차 학벌에 대한 강박관념은 상당한 것 같다. 그런데 아쉬운 일이지만 실제로 대학생 한 명 한 명 에게는 학벌 사회 구조 자체를 바꿀 역량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김형태(너 외롭구나의 저자 겸 카운슬러)의 말마따나 사회에 문제가 있다면 당장 내 주변부터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동료를 만들라는 조언을 새겨볼만 하다. 나는 대학 생활 중에 그런 식으로 학벌 사회의 폐해를 인식하고 그것에 따른 개인적인 대안을 찾아 실천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시민 사회 단체인 학벌없는사회 학생모임의 전 대표 김고종호는 그 방법으로 동문 멘탈리티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기에 어떤 곳에서든지 자신의 학교를 밝히지 않으며, ‘우리 학교’라는 표현을 일체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같은 곳에서 활동한 엄수홍은 학벌이 준 부수적인 이득인 과외를 거부하고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에게 그런 행위를 권유한다고 한다. 또 한 선배는 조금 완화된 방법을 썼는데, 과외 역시 아르바이트의 평균 시급과 같은, 대략 3천 원 정도로 계산해 나름대로의 과외 가격을 책정한 바가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땠을까, 한 번 돌아보자. 어떤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학교를 말하지 않았다. 강연회나 세미나에서는 소개를 하게 될 때, “서울 사는 대학생”, “열정적인 청년” 등으로 시작을 했는데, 한 번은 같이 참여한 후배가 고맙게도 내 이후에 소개할 때 “이 사람과 같은 곳에서 온”으로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대학 연합 커뮤니티 같은 곳을 갈 때에는 같은 학교 학생끼리 모이게 되는 경우를 최대한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다른 학교 대학생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기회가 되어 자연스럽게 서로 학교를 말하게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사람의 학교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인위적으로 상대방의 학교에 신경 쓰지 말자고 주문을 걸었는데, 지금은 전보다 조금 나아진 것 같다. 가령 무슨 학과의 누구, 어떤 동아리의 누구, 어떤 일을 좋아하는 혹은 잘 하는 학생으로 인식을 하려고 노력하고, ‘어느 대학 몇 학번 누구’라는 식의 사고를 버리고 있는 중이다.

  사실 내가 학벌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그래도 소통과 교류를 좋아하는 녀석이 단순히 상대방이 재학 중인 학교 하나 때문에 스스로 다른 사람과의 그것을 막아버리면 어떻게 할까, 라는 걱정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가 나로 인해 소외감을 느끼면 어쩌나, 하는 생각. 그렇게 보면 내 행동은 다분히 의식적이기만 했고 부질없는 짓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글을 보는 이들이 열린 마음으로 이런 사례가 있구나, 정도로만 생각하고 또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하고 한두 번쯤 고민해보고 하나씩 실천해 본다면 학벌 사회의 폐해를 완화시킬 수 있는 더 좋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by 오픈-toU | 2007/06/15 01:42 | 2. opinion - our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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